학서선생문집 권9 中 의장절목서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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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義庄節目序

吾州古俗尊吏而畏法豈弟之澤軼美於眉州况惟吾 柳世受 國恩家傳忠孝居官則長廉遠恥以恪勤事 任處家則守拙安分以萃合宗族比是吾家由來型範 其敢忽哉蘇長公之文曰官稅早輸優遊散誕比不過 自家一已上康濟經綸而亦可見畏法中一事官有稅 輸之不早爲 命吏者不得己繫縲焉桎梏焉雖欲占 取優閒境界不可得矣我 朝還餉之法便成關和散 之有時斂之有節分留之數各有條式升籥之徵必遵

簿書其或拘於力勢失期於收納之際則繫縲桎梏勢 所必至可不畏哉第惟吾族之居在河猥一區者雖有 蕃衍之稱率多窘束之憂一番糶戶之編輒生他土之 念蓋其本無世業之根基居濱大河野無灌旣備無俱 兼闔族同然故也一門老少胥訓胥敎顧不暇私計之 謀畫要不失公家之賦役以效出粟米麻絲以事其上 之義而公家賦役還餉爲最遂聚門內公私如干金穀 以爲逐年糴糶時擔當措備之需名之曰義莊甚盛擧 也雖然莊之以義爲名其義鄭重凡我同約之人果能 恪遵而勿毁之否乎官令不遵非義也宗族不睦非義

也忿爭鬪訟以煩官聽非義也吳乖故事可按而考也 我城主鄭公基善聞而嘉之所陳諸條幷皆許施因 敍其顚末書諸節目之後鄭公惠愛之及其將攢手於 百世之遠矣多少條列錄在左旁其各銘念而勿替焉 則吾家忠孝之傳亶不外是而尊吏畏法之俗庶復見 於今曰懼其不固也書以警之

義莊節目序(의장절목서) 번역·해설


전체 번역: 의장절목 서문

우리 고을의 옛 풍속은 관리를 존중하고 법을 두려워하는 것이었으니, 은택(恩澤)이 미주(眉州, 소동파의 고향으로 풍속이 좋기로 유명했던 곳)의 아름다움을 능가하였다. 하물며 우리 류씨(柳氏) 집안은 대대로 국가의 은혜를 받고 집안에 충효가 전해져, 관직에 있을 때는 청렴을 숭상하고 수치를 멀리하며 공경하고 부지런함으로써 직무를 섬겼고, 집안을 다스릴 때는 소박함을 지키고 분수에 안주하여 종족을 모으고 합치는 것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우리 집안의 유래된 모범이다.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소장공(蘇長公, 소동파)의 글에 이르기를 "관청의 세금을 일찍 납부하면 여유롭게 한가로이 지낼 수 있다"고 하였으니, 비록 자기 한 몸의 편안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경륜(經綸, 나라를 다스리는 큰 계획)에 있어서도 법을 두려워하는 중에 한 가지 일을 볼 수 있다. 관청에 세금이 있어 일찍 납부하지 않으면 명령을 받은 관리가 부득이하게 포승줄로 묶고 칼과 차꼬를 채우게 되니, 비록 한가로운 경지를 차지하고자 해도 얻을 수 없게 된다.

우리 조정의 환상법(還餉法, 환곡제도)은 편리하게 관화(關和, 조세 징수와 분배)를 이루어, 나누어 주는 데 때가 있고 거두는 데 절도가 있으며, 분류(分留, 나누어 남겨두는 것)의 수량은 각각 조식(條式, 규정과 법식)이 있고, 승약(升籥, 곡식을 되로 재는 것)의 징수는 반드시 장부를 따라야 한다. 혹시라도 힘의 형세에 구속되어 수납의 시기를 놓치게 되면 포승줄과 칼과 차꼬가 형세상 반드시 이르게 되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 일족이 하외(河猥, 강가의 낮은 지역을 일컫는 것으로 보임)한 구역에 거주하는 자들은 비록 번성하였다는 칭호가 있으나 대부분 궁핍함의 근심이 많아서, 한 번 조호(糶戶, 곡식을 파는 호적)의 편성이 있으면 곧 다른 땅으로 떠나려는 생각이 생긴다. 대개 그 근본에 세업(世業, 대대로 내려오는 생업)의 기초가 없고, 큰 강가에 거주하면서 들판에는 관개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농사와 누에치기를 겸비하지 못하여 일족이 모두 그러하기 때문이다.

일문(一門, 한 집안)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이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되, 돌아보건대 사사로운 계책의 도모가 여유롭지 못하니, 요컨대 공가(公家, 관청)의 부역을 잃지 않아 "곡식과 쌀과 삼베와 비단을 내어 윗사람을 섬긴다"는 의리를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공가의 부역 중에 환상이 가장 중요하므로, 마침내 문중의 공사(公私) 금곡(金穀, 돈과 곡식)을 모아 해마다 곡식을 사고파는 때에 담당하여 대비하는 데 필요한 자금으로 삼으니, 이것을 의장(義莊, 의로운 창고)이라 이름하였다. 참으로 훌륭한 거사이다.

그러나 창고를 의(義)로써 이름한 만큼 그 의리가 정중하니, 무릇 우리 동약(同約, 같은 약속을 맺은 사람들)의 사람들이 과연 능히 공경히 준수하여 훼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관청의 명령을 준수하지 않는 것은 의가 아니고, 종족이 화목하지 않은 것은 의가 아니며, 분노하여 다투고 송사하여 관청의 재판을 번거롭게 하는 것은 의가 아니다. 오씨(吳氏, 중국 송나라 때 범중엄이 만든 범씨의장의 사례)의 옛 일은 고찰할 수 있다.

우리 성주(城主) 정공(鄭公) 기선(基善)이 듣고 가상히 여겨 진술한 여러 조항을 모두 허락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인하여 그 전말(顚末, 시작과 끝)을 서술하여 절목의 뒤에 기록하니, 정공의 혜애(惠愛, 은혜로운 사랑)가 백세(百世)의 먼 후대에까지 미칠 것이다. 많은 조항들이 왼쪽 옆에 기록되어 있으니, 각자 마음에 새기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 집안의 충효의 전통이 진실로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고, 관리를 존중하고 법을 두려워하는 풍속이 거의 오늘날에 다시 보이게 될 것이다. 그것이 견고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글로 써서 경계하는 바이다.